조선/대한제국 고종의 정비이자 조선의 마지막 군주 순종의 모친. 숙종의 모친인 '명성왕후' 김씨와 헷갈릴 수 있다.
비난하는 입장이나 1980년대 이전 교육을 받은 경우에는 민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을미사변으로 일본인들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왕비이다.
여러 가지 의미로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왕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정부패와 사치, 외세를 불러오는 등의 행위로 조선이 파탄나고 옆나라에게 먹히게 되는 참상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의해 살해된 점 때문에 여론과 미디어에 의해 세탁 조선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 철의 여인과 같은 이미지로 상당히 미화되고 있다는 시각이 있다.
반면 명성황후의 부정부패와 사치 등의 것들을 반박하며 명성황후의 공과 모두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시각이 대립한다.
역사인물 대부분에서 이런 성향이 존재하지만, 비교적 근대인 이 왕실가족은 이런 시각차이가 상당히 강하다.
1895년 침실에서 일본의 자객들에게 암살당하였다. 향년 45세. 시신은 석유가 뿌려진 후, 소각되었다.
아래 사진이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사진으로 가장 유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은 일부 기록에 의하면 궁녀로 나와있기도 하다.
명성황후의 실제 사진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아래 사진은 일본에서 그렸다는 명성황후와 고종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초상화이다.
그러나 이 사진 역시 진짜인지 판별되지 않았다.
명성황후는 1851년 11월 17일 경기도 여주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민치록, 어머니는 이씨이다.
어린 시절 유복한 집안 덕에 괜찮게 살은 것으로 알려졌다.
왕후 민씨는 남편 고종의 친정선언으로 인해 흥선대원군과 그 파벌이 밀려난 권력의 공백에 자신의 여흥 민씨 일가를 불러들였고, 본래 소수 파벌이었던 민씨 일파는 자신들의 친척들을 동원하여 매관매직에 참여, 파벌의 덩치를 순식간에 불리었고 이 행위를 수장 왕후 민씨가 눈감아 주거나 조장해서 여흥 민씨 집단이 단기간에 급성장하는 원동력이 된다.
대원군 축출 이후 강화도 조약까지의 조선의 정치 상황은 구 대원군 일파, 민씨 일파, 중도인 안동 김씨, 이최응을 비롯한 반대원군 종친 세력이 균형을 이루는 상황이었는데 운요호 사건이 터진다.
일단 야만인이라고 얕보던 일본에게 처참하게 깨진 건 둘째치고 박규수를 비롯한 대원군 일파, 이최응, 고종이 모두 개항에 이득이 될 것 같다고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은 개항된다.
그리고 어설프지만 소위 근대화라는 것이 조금씩 시도되기 시작한다.
이 근대화를 핑계로 자신들의 세력을 굳건히 한 민씨 일파는 자신들의 사욕을 채우기 시작했고 결국 1882년, 신식군대 별기군에 대한 과도한 우대에 격앙한 구식군대들의 반발과 일반 백성들의 분노가 모여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궁녀로 변장하여 무예별감 홍재희의 등에 업혀 명성황후를 선두로 민씨 일파는 장호원으로 피신하게 되며 이 피신사건이 대대적으로 알려져, 사실상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다.
그런데, 강화도 조약에 대해선 이런 말도 있다. 조선 궁중 외교비록인 '선유실록'에 의하면 명성황후는 강화도 조약에 반발했으나 좌파당성 1군수 김현참 종1품을 비롯한 유생들이 명성황후에 강하게 반발하고 왕에게 상소를 올려 통과되었다고 한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노골적으로 러시아의 개입을 허락하고 고종이 일본 교관들이 양성한 훈련대의 해산방침을 통보하자 일본은 그 결정의 배후로 지목된 명성황후를 암살하기 위해 1895년 10월 8일, 일본 군대와 경찰 및 조선군 훈련대 등을 동원해 경복궁을 공격한다.
일본군과 경찰이 시위대를 몰아내고 같이 온 일본 낭인들이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한다.
그리고 그 시체를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을미사변', '을미의 변'이란 이름으로 기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