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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현상금 320억을 걸었던 '약산 김원봉'에 대해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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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 선생에 대해 들어보셨는지요?


전설적인 독립운동기구 였던 의열단, 혁명당, 의용대를 조직했던 독립운동가입니다.


안타깝께도 월북하여 평가 절하되었던 인물인데요.


이제 시대도 바뀌었고 공과 사를 구분하는 의미에서 약산 김원봉 선생에 대해 소개합니다.


참고로 영화 '암살'에서 조승우씨가 연기를 했던 인물입니다.


김원봉 선생의 출생?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경성부 중앙중학교를 중퇴한 뒤 중국 남징 금륭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굉장히 의협심이 강했다고 하는데요.


이 후 만주 신흥무관학교에서 공부했으나 자퇴합니다.


의열단 활동?



약산 김원봉 선생은 1919년에 의열단을 조작하여 일제의 주요 인물들을 암살하는 항일투쟁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무장투쟁을 위해 더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 정부가 설립한 광저우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 때 배운 군사지 그리고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조선민주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합니다.


1927년에는 저우언라이 등이 중국 공산당 출범을 이루어낸 나창봉기에도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사상에 관계 없이 군사기술을 배우기 위해 여러 학교 및 세력에 가담했던 것입니다.


조선 의용대 조직?




1932년에 일입니다.


장제스의 도움을 받아 중국 난징 외곽에 조선혁명간부학교라는 것을 설치하여 요원을 모집합니다.


조선의용대의 모체인데요.


당시 조선의용대는 국민당 정부군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일본과 대항해 싸워 국민당으로부터 일정 비용을 지원바닸습니다.


조선의용대의 분열



하지만 당시 젊은 대원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의견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왜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훈련만 받고 정부 수집활동만 하느냐


일본군대가 있는 곳에서 싸우고 싶다.


이러한 운동의 일환으로 박효삼이 일부 대원들을 데리고 이탈하면서 조선의용대는 분열하기 시작합니다.


약산 김원봉 선생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약산 김원봉 선생은 42년에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는데요.


임시정부에서 광복군 부사령관을 맡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김구 선생을 비롯한 우익세력과 심한 마찰을 겪게 됩니다.


광복이후에도 서로를 친일파 혹은 빨갱이라고 비난할 만큼 앙금을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해방이후?


광복이되자 귀국합니다.


하지만 역시 우익과 마찰을 겪게 되고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에 합류합니다.


47년에 여운형 선생이 암살을 당하는데요.


이때 김원봉은 격분하여 여운형의 유지를 받들어 미소공위를 성공시키자고 호소합니다.


친일파에게 굴욕을 당하다.



악질 친일파 노덕술에게 같은 고문을 당합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데 끌려 나와 따귀를 맞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요.


김원봉은 광복이 되었음에도 친일파에게 수모를 당하자 남한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원봉은 일제에게 조차 잡혀본 적이 없었는데 광복 후 내나라에서 친일파에게 수모를 당했으니까요.


북한정권 수림에 참여한 후 실각


약산 김원봉 선생은 1948년 남북협상 때 북한으로 갔다가 그대로 잔류.. 


결국 월북행을 택합니다.


북한정권이 수립되면서 서열 7위에 오를 정도로 성공합니다.


노동상,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의장 등 북한의 높은 자리를 두루 거치게 됩니다.


문제는 1956년 터진 8월 종파사건.


김일성의 정적을 숙청한 사건에 연류 된후 1958년 전면 실각합니다.


그 이후는 행방을 알수가 없습니다.


자살했다는 설, 총살 당했다는 설, 시골로 내려갔다는 설 


여러 설이 제기 되었지만 유력한 것은 이때 사망했다는 것..


가장 유력한 설로는 김일성에 의해 형무소로 끌려간 후 화를 참지 못하고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는 설입니다.


약산 김원봉은 일제가 가장 무서워한 독립운동가



독립운동 중에 무장투쟁에 있어서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는 독립운동가입니다.


일제는 당시 김원봉을 잡기 위해 현상금 100만원을 걸었는데요.


지금으로 환산하면 320억의 가치입니다.


김구 선생에게 걸었던 현상금이 60만원이었던 점과 비교해 본다면 얼마나 일제가 무서워한 인물인지를 알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약산 김원봉 선생이 조선의용대 선무공작 연설 영상입니다.


약산 김원봉 선생의 육성을 생생히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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